가문을 빛낸 선조
(7世)성달생의 행장과 성삼문(達生,三問)의 유년기
- 1. 계도
시조 성인보-(二世)성송국- (三世)성공필-(4世)성군미 - (子) 성한충
└ (二子)성한필└ (一子)성군부 -(二子)성여완
(5世) 성여완(호,이헌, 시호.문정, 군호.창녕부원군)
(6世) 長子 성석린(호.독곡. 시호.문경) (관.영의정 초대서울시장, 함흥차사역임)
(三子) 성석연(호.상곡, 시호.정평, 관.판서)
(四子) 성석번(관.총랑)
(二子) 성석용(成石瑢) (호.회곡, 시호.문숙, 관 보문각대제학)
(七世) 長子 성달생 (시호,양혜,관.오위도총관,숭록대부판중추원사)
(二子) 성개(호,수헌, 관첨경기관찰사) - (八世)성희(호.인재.九世.長子)
성담수(生六臣)-(十世)성용정 (夏山君)
(三子) 성허(관.참의)-(八世) 성구연(관사직)
(八世) (長子)성승(시호.충숙, 관 중추원사겸 오위도총부도총관)- (九世) 성삼문(死六臣)
(八世) (二子)성증(관.좌참찬)-(六世) 성삼석(관.판관), 성삼구(관.현감) 2. 公은 고려 우왕2년(1376)에 출생하시어 1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음직으로 낭장에 이르렀고 이조 태종2년 무과시(武科試.첫해)에 1등으로 합격하여 흥덕진 병마사로 나갔다.
태종10년 무과 重試에 2등으로 합격하시고 전라도관찰사겸 병마절제사.종군충재 평안도 관찰사 정2품공조판서 숭정대부종1품지중추원사,(숭록대부)판중추원사를 역임하셨다.
公께서 임금이 청주초수행차시 호종하시다 별세 하시니 향년은 69세(태종26년1444)이셨다. 임금이 조문하고 전의를 하사 했으며 관장하여 장례를 치루고 시호를 양혜라 하였다.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금곡리 쇠꼴마을 파평산줄기 관모산 중턱에 성삼문의 조부 성달생의 묘와 (二子)성승, 손 성삼석의 설단이 있다.
公께서는 태종과 세종시대에 문무와 외교에 많은 공적을 남기신분으로 변방 곳곳이 야인(여진족,왜구등)들의 침입이 잇을때마다 (함길도 평안도 수차례) 징벌 하시니 세종대왕의 북벌정책의 선봉장으로 육진개척에 많은 공을 세워 국토확장에 공헌하엿으며 조정에 들어와 각부서에 봉직하며 수행한 수많은 치적과 외교활동으로(사신으로 수차례 명나라 방문)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公께서는 필적 도한 뛰어나 친히 쓴 묘법연화경 필사본의 판각본이 국가문화재 보물제961호(원각사), 보물제971호(중앙박물관) 보물제 1306호(직지사)로 지정 되었으며 지방문화재 5점(전북, 제주도등)이 지정되었고 효심과 불심이 깊어 부친의 추복을 빌어 화암사(전라완주)를 중창한 중창비(전북문화재 제94호)와 사찰(국가유형문화재 보물제662호, 663호)이 있다.
公의 공적이 더 많으련만 가리게 된것이 아들 성승(도총관)과 손자 성삼문(사육신)등의 세조2년 단종복위사건(병자사화)으로 장자와 손, 증손 모두(13명) 순절되고 가산이 적몰 멸문되니 전하지 못한 것으로 사료된다. 차자 성증(우참찬)과 손자 성삼석(판관), 성삼구(현감)등은 참형을 면하고 삭탈관직 귀양 되었다.
- 3. 파주시 금곡리쇠꼴마을에 적성방향으로 지척인 오른쪽 동네를 개묵(皆墨)이라 부르는데 관모산 중턱 성달생묘 인접한 동네이다. 이곳에 작은 계곡이 있는데 개묵골(먹물이 많이 흐르던골)이 있고 상류쪽에 “문수암자”가 잇는데 이곳에서 성삼문이 어릴때 공부하던 곳이라 전해온다(쇠꼴마을 김교화)
- 산밑에는 成부터 또는 成지터(성달생께서 쉴때 살던곳 추정)라 칭하고 집터가 있으니 이곳에서 수학 하던곳으로 추정된다.
2世 시중공(侍中公)
공의 휘는 송국(松國)이며 중윤을 지낸 시조(휘.인보)의 독자이시다.
시조께서 정조(正朝)로 송경에 갔다가 별세하시니 고향에 장례를 치루기 위하 여 공은 나무로 들것을 만들어 몸소 시신을 짊어지고 천리길 현풍현 청산원(靑山院)에 이르러 가숙 하시었다. 아침에 보니 밤새 쿤눈이 내렸는데 호랑이의 발자국이 시신주의를 맴돌고 서쪽 맥산(麥山)위에 이르렀다. 한곳만 눈이 녹아 있었으며 정남향의 자리 인지라 여기에 안장하였다. 후에 공은 벼슬이 광정대부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대대손손 자손들이 높은 벼슬길에 올랐으니 이는 공의 효성(天里負屍感天大孝)이 지극함의 소치라 전한다. 후에 효행록(孝行錄) 십도찬(十圖贊)을 유촌공 휘.환(煥)이 지었다.
공은 휘.공필(公弼)과 휘 한필(漢弼)을 낳으시니 휘 공필은 봉익대부(종2품) 판 도판서에 추증되셨고 두아들을 두었으니 장자 휘 군미는 봉상대부(정4품)판도 총랑 차자 휘군부는 벼슬이 시랑(정4품)에 이르렀다. 총랑 휘 군미와 장자 휘 한충은 판한성부사(정3품) 차자 휘 여완은(종2품정당문학상의) 창녕부원군에 봉해졌고 휘 군부의 장자 휘 준득(정3품상서)과 차자 휘 유득(정1품정승)을 낳 으셨다.
묘 산 도
7世 성 개 (成慨)
호는 수헌(數軒)이시며 회곡공의 차남이신데 태종16년(1416)에 문과 과거시 乙科 제2人으로 급제하여 시독관, 대독관을 하였으며 병조참판,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셨다.
公께서는 학문도 깊었지만 명필이셨는데 세종대왕때 왕명으로 대비(大妃)의 발원을 위하여 백형 양혜공과 함께 내불당(內佛堂)에 법화경을 金字로 써서 바쳤고 태상왕을 위하여도 법화경을 써서 바쳤다. 또한 헌릉(태종의 陵)의 비명(碑銘)을, 정 (태조의 父 항조)의 비명을, 그 외 문경공(휘,석린, 독곡)묘비와 음기를, 고양시의 성령대군의 묘비를 쓰셨다. 예조에 계실 때 위공(委공)의 십사소(十四疎)를 써서 임금이 보시도록 하셨다. 公의 사위는 연안김씨 김해의 묘를 成門선산인 파주 파평산 명당에 썼는데 그후 김전, 김안노등 5인의 정승을 배출하고 부마와 왕비(인목대비)가 배출 되었다.
公의 유적잋 유문이 많이 있으련만 단종복위 사건으로 가산이 적몰되고 가족이 이산되어 전하지 못했으리라 사료된다, 公의 이름이 대동필원과 동국여지승람및 명현록에 실려있고 해남의 금성사(琴城祀)에 배향되었다.
독곡 성석린
※참고: 이 글은 세종(世宗) 5년1월12일 세종대왕이 내린 제문(祭文)으로、세종이 세자시절 세자부(世子傅:스승)이었던 독곡성석린선생(1339~1423,향년86세)이 사망하자 三日間 輟朝하고 悲痛한 마음을 담아 그간의 업적과 노고를 나타내어 제문을 지었으며 禮官을 보내어 致祭하였다.
사:제문 (賜祭文)
光嶽鍾秀克生正人國家將興賴爲元氣慨英靈之已逝宜恤典之崇頒惟卿名門甲姓間世雄才早捷文場橫翔藝苑以麟鳳瑞世之資蘊房杜經綸之業而文之以董韓學術之精深他如詩律之嚴筆法之妙皆其餘事是故當雲雷屯難之日遇知於聖祖及姦宄㭬訌之時佐命於太宗繇是登台司而承弼厥辟作元宰而德潤生民鎭定乎震憾擊撞調劑乎辛甘燥濕身佩安危爲朝廷倚重者盖數十年餘矣其勳名偉績藏之盟府紀于策書在人耳目昭如日星嗟予寡人遭天不吊將求攸濟正惟聖祖昭考之舊臣是仰顧瞻在庭十數臣外罔有存者良用惻然卿以四朝之老蔚爲三壽之朋洪範之五福純備汾陽之終始無虧元龜喬木眷注匪輕胡不百年遽貽䀌傷永懷社稷之宗臣蓋享情文之異數肆修薄奠往慰貞魂於獻雲從龍風從虎勳盟重指於山河君視手臣視心報施何殊於存沒
사:제문 (賜祭文)
삼광(三光:해, 달, 별)과 오악(五嶽:백두산,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삼각산)이 정기(精氣)를 모아 능히 정인(正人)을 낳았는데、 국가가 장차 흥왕하려 할 제 그의 힘으로 원기(元氣)를 삼았었다。이미 가신 영령(英靈)을 슬퍼함에、휼전(恤典)을 높이 내림이 마땅하도다. 경은 명문(名門)의 갑성(甲姓)이요、간세(間世:수세기에 드문)의 웅재(雄才)이였다。일찍이 문장(文場)에 승리(勝利)하여 예원(藝苑)에 이름을 떨치니、세상에 빛나는 기린과 봉황의 자질로서 방현령(房玄齡:지모(智謀)에 뛰어난 자)과 두여회(杜如晦:판단력이 뛰어났음)(당(唐)나라 초기의 명재상들)의 경륜(經綸)을 쌓았고、학문은 동중서(童仲舒:전한(前漢)의 학자)와 한유(韓愈: 당(唐)나라의 문장가(文章家))의 정심(精深)한 학술(學術)로 빛났으며、기타 시율(詩律)의 엄정(嚴整)한 것이나 필법(筆法)의 정묘(精妙)한 것은 모두 여사(餘事)였다。이런 까닭으로 시국이 어지러운 시기를 당하여 성조(聖祖태조)에게 인정을 받았고、악당(惡黨)들이 분란(紛亂)을 일으킬 때에 태종(太宗)에게 천명(天命)을 도왔었다。이로 말미암아 정승의 자리에 올라서 임금을 받들어 도왔으며、수상(首相)이 되어 덕은 생민(生民)을 윤택하게 하였도다. 진감격당(震撼擊撞)하여 시국의 불안(不安)을 진정(鎭定)시키고、신감조습(辛甘燥濕)으로 불평(不平)을 조화(調和)시키기도 하였다。
몸소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함을 걸머졌으니、조정에서 그를 의지하여 믿은 지가 대개 수십여 년이나 되었다。그 공명(功名)과 위대한 업적은 맹부(盟府)에 간수되고、책서(策書)에 기록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해와 별과 같도다. 아 아、내가 덕이 적은 사람으로 하늘이 돌보지 않는 때를 만나 장차 세상을 구제할 사람을 구하려 하매 바로 성조(聖祖)와 소고(昭考태종)의 구신(舊臣)에게 바라는 바 많았노라。 사방을 돌아보니、조정에 있는 신하는 십여 명 외에 살아있는 사람이 없기에 참으로 슬퍼하였노라。경은 네 조정(朝廷)의 원로(元老)로 호화롭게 삼경(三卿)의 짝이 되었다。홍범(洪範서경의편명)의 오복(五福)을 다 갖추었으니、분양(汾陽郭子儀)처럼 처음에서 끝까지 결함이 없었다. 큰 거북과 교목(喬木) 같은 존재에 기대함이 컸는데、어찌 백세를 못 누리고 갑자기 이 애처로운 슬픔만 남겼는고。사직(社稷)의 종신(宗臣)을 영원히 생각하니、어찌 정문(情文)의 특별한 예수(禮數)를 올리지 않겠는가。이에 박한 제물(祭物)을 갖추어 가서 정혼(貞魂)을 위로하게 하노라。아아、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매、훈공의 맹서가 산하(山河)를 가리키면서 무겁게 되고 임금은 신하를 손 같이 대하고、신하는 임금을 심장같이 받드니、보시(報施)가 어찌 생존하고 사망하는데 다를 수 있으랴。
두여회(杜如晦) :
房玄齡 ·杜如晦 :당(唐)나라 초기의 명재상。 방현령은 지모(智謀)에 뛰어나고 두여회는 판단력이 뛰어났음.
한유(韓愈) :
董仲舒·韓愈 : 동중서는 전한(前漢)의 학자이며、한유는 당(唐)나라의 문장가(文章家)
물계서원 봉향 21선생
봉향 21선생 행장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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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선생
창녕성씨 시조 고려 중윤 휘 인보의 아드님이신 휘 송국은 천성이 효성스러워 어버 이를 섬김에 사랑과 공경을 다하였다.시조공이 송경에 조회차 입경하셨다가 병으로 돌아 가시자 반장함에 지개를 만들어 몸소 시신을 지고 하루에 몇 번씩 쉬며 걸어서 창녕의 청산원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눈이 많이 내려서 임시로 청산원 곁채에서 잤다. 아침에 보니 호랑이 발자국이 시신을 둘러 쌌는데 시신에는 아무런 해도 없었고 호랑이가 온 자 취는 없고 간 자취만 있었다. 이상하게 여겨져서 호랑이 발자국을 따라갔다. 큰 길을 넘 어서 서쪽으로 두 활마당쯤 가다가 들판 가운데 우뚝 솟은 백산이란 구능에 이르렀다. 그 산정에 도달하자 발자국은 사라지고 눈이 녹았는데 자리 하나 정도 넓이에 지세는 북 쪽으로 않아서 남쪽을 향하였다. 그래서 거기다 표식을 해놓고 돌아와 이곳에 안장하였 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선생은 귀하게 되고 이름이 나서 벼슬이 광정대부 문하시 중에 이르고 자손은 대대로 벼슬하게 되니 사람들은 효성에 감응되어 그렇게 된것이라 하였다, 묘는 창녕 우항산 인좌의 언덕에 있다. 후손 참의 환은 효행록을 편집하고 효행 에 관한 십도시찬을 지었다. 감사 진선은 묘갈을 짓고 참판 덕조는 비음기를 추술하였 다. 물계서원에서 주벽으로 제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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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선생
선생의 휘는 여완이고 호는 이헌인데 총랑공 휘 군미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증 손이시다. 고려말 기유년(1309년)에 출생 하셨으며 병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첨서밀직 과 정당문학을 지내셨다. 이태조가 등극함에 왕방산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고 절의를 지 키시다가 정축년(1397)에 향년 89세로 별세 하셨다. 시호는 문정이고 순조 무진년 (1808)에 본원에 추향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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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선생
선생의 휘는 준득이고 호는 동고인데 시랑공 휘 군부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증손이시다. 벼슬은 총부상서 예문간제학에 이르렀고 성절사로 명나라에 가서 명태조와의 문답에 경륜을 밝히니 매우 기뻐하고 관복과 악기 및 홍무대통력과 육경, 사서, 통감한서를 하 사 받았다. 철종 정사년에 본원에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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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절선생
선생의 휘는 사제이고 의정부 의정 휘 유득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현손이시다. 고려 공민왕때에 제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보문각 직제학에 이르렀고 이태조가 등극함에 차라 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가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동지와 더불어 만수산 두문동 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키신 두문동 칠십이현의 한분이시다.당우 임신년에 정절 이라 시호하였으며 정조 정사년(1797)에 본원에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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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곡선생
선생의 휘는 석린이고 자는 자수이며 호는 독곡인데 이헌 휘 여완의 네 아들중 맏 아드 님이고 시중선생의 고손이시다. 1338무인 12월 3일생이며 송경 독곡방에서 태어나 호를 독곡이라했다. 1355을미 18세시 사마시에 합격 1359정유 20세에 문과 급제하여 국자감 에 제수 1387정묘 50세에 정이품에 오르고 1401신사 64세에 정일품 영의정에 올라 영 상, 좌상, 우상직을 두루 역임하다가 1423 세종5년 계묘졍월 12일 86세에 별세하시니 시 문경이고 포천 왕방산에 예장 하였다. 정축 1997년 본원에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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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선생
선생의 휘는 승인데 양혜공 휘 달생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6대손이시다. 무과에 급 제하여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단종을해년에 도총관이 되었고 병자년에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부자가 함께 화를 당하였다. 숙종 신미년에 숭록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정조 신축년에 충숙이라 시호하였다. 정축년(1797년)에 본원에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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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선생
선생의 휘는 희이고 자는 용회이며 호는 인재인데 수헌 참판 휘 개(槪)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6대손이시다. 세종경오년에 명경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승정원 교리였는데 성망이 조정에 가득하였다 한다. 병자년 단종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김해에 유배되었다 가 무인년에 연좌가 풀려서 공주 달전에서 두문은거 하였다. 갑신년에 별세하셨고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순조 무진년(1808년)에 본원에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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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죽당선생
선생의 휘는 삼문이고 자는 근보이며 호는 매죽당인데 도총관 휘 승의 아드님이고 시중 선생의 7대손이시다. 세종무오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정묘년에 수찬관으로 있으면서 중시에 장원급제 하였다.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창제의 주역이시고 단종복위 사건 의 실패로 화를 입은 사육신의 한분이시다. 숙종때 관직이 회복되었고 벼슬은 우승지이 고 시호는 충문이며 영조5년에 본원에 봉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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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두선생
선생의 휘는 담수이고 자는 미수이며 호는 문두인데 교리 희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7대손이시다. 병자사화에 부친과 연루되어 김해로 유배 되었고 그 후 연좌가 풀리게되 자 파주 두포리 몽구정에 살면서 두문불출 하시다가 별세하였다 함안의 서산서원에 봉 향돼 정숙이라 시호하였다. 영조5년(1729년)에 봉향하였다. 생육신의 한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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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선생
선생의 휘는 수침이고 자는 중옥이며 호는 청송인데 대사헌 사숙 휘 세순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9대손이시다. 우계선생의 아버님이고 조정암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 고 루차 제관하였으나 불취하였다. 숙종때 우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이다. 기 유 영조5년에 봉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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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효선생
선생의 휘는 수종이고 자는 숙옥인데 사숙 휘 세순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9대손이시다. 조정암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정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가정계사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39세였다. 영조3 정미년에 본원에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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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선생
선생의 휘는 운이고 자는 건숙이며 호는 대곡인데 송암 휘 세준의 아드님이고 시중선 생의 9대손이시다. 소과에 합격하여 두 번이나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고 오직 두 문구도하여 대학자가 되었다. 영조5년엥 봉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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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선생
선생의 휘는 제원이고 자는 자경이며 호는 동주인데 부사 휘 몽선의 아드님이고 시중 선생의 9대손이시다. 환훤당 김굉필선생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셨다. 효행이 지극하 여 군수가 추천 보은현감에 임명되여 6년간 종사하였다. 1506년에 출생하여 1559년에 별세하셨다. 기유 영조5년에 봉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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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곡선생
선생의 휘는 윤해이고 자는 화중이며 호는 판곡인데 참봉 휘 근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 의 10대손이시다. 상주 원통산 아래에 은거하여 두문구도하였다. 이름이 조정에 알려져 참봉,왕자사전과 태인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였다. 1526년에 별세하시니 향년 67 세였다. 기유 영조5년에 본운에 봉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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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선생
선생의 휘는 혼이고 자는 호원이며 호는 우계인데 문정공 청송 휘 수침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10대손이시다. 가정의 학통을 계승하여 도의 깨달음잉 매우 빨랐으나 과거 공부를 페하고 오로지 위기의 학문에 마음을 두어 성리학의 대가가 되었다. 후학을 가 르치느라 서실의를 지어 학문하는 방법과 도학을 연구하여 사칠리기설을 세웠다. 무술 년(1598)에 별세하시니 향년 64세였다. 일부 사람들의 중상으로 화를 입어 벼슬이 추 탈됨에 이르렀으나 인조때에 곧 복관되어 좌의정에 증직되었고 문간의 시호가 내렸다. 숙종 임술년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파산서원에 청송선생과 같이 배향 되었으며 기유 영 조5년(1729)에 본원에 봉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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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선생
선생의 휘는 수경이고 자는 승약인데 처사 휘 흔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10대손이시다. 임진년(1592)에 음직으로 진주판관이 되어 왜침을 받자 조총을 주조하고 화전을 만 들어 병기를 마련하였고 군량조달을 완비하여 분전하고 적을 격퇴시켜 많은 노획물을 얻고 대승하였으나 계속되는 적의 침공에 순절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순조8년 에 본원에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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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선생
선생의 휘는 언충이고 자는 근숙이며 호는 가정인데 돈녕부 부정 휘 세온의 아드님이 고 시중선생의 십일대손이시다. 1533년 1월 6일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나시니 1567년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 진사가 되었다 하서선생과 교유하셨으며 학문과 덕이 높아 군자 라 일컬었으며 성리학의 진리가 밝아 가례와 가규로 삼았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 명종 정묘에 나라가 어지러움을 보고 선비정신의 학문을 닦으며 은거하던중 동부참봉과 의금 부 도사로 제수되었으나 노령임을 들어 불취하고 낙향, 옥천, 양남, 동촌(현재영동)에 정착하여 성씨의 근원을 이루었는데 풍곡당에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유생들의 강학으 로 여생을 보내다 임자년 향년 80세로 별세하였다.그후 영동 호계서원과 협천 구산서원 에 배향되었으며 1997년정축 본원에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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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선생
선생의 휘는 람이고 자는 사열이며 호는 청죽인데 감사 증 좌찬성 휘 세평의 아드님이 고 시중선생의 11대손이시다. 학문이 정대하고 정밀심오하여 주자학을 탐독하여 경륜과 계획이 명백하였다. 벼슬이 공조좌랑에 이르고 무주 현감에 제수되었다. 만력 경신년에 별세하니 향년 65세였다. 순조8년에 본원에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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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선생
선생의 휘는 문준이고 자는 중침이며 호는 창랑인데 문간공 우계 휘 혼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11대손이시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해관하고 돌 아왔다. 계해년에 인조가 반정하자 학행으로 추천되어 영동현감에 임명되여 문행과 충신은 세상의 모범이 되었다. 병인년(1626)에 별세하시니 향년 68세였다. 효종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무진 순조8년(1808)에 본원에 추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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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선생
선생의 휘는 부사인데 증 한성우윤 휘 두년의 아드님이고 시중선생의 13대손이시다.
기유년에 생원지사 양과에 합격하고 계축년에 동당시에 장원하였으나 세도가 혼란함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진주 금산리에서 은거하며 계시약을 맺어 여씨향약과 퇴계선생의 동약을 모방하였고 많은 후생을 양성하였다. 숭정 임신년(1632)에 별세하시니 향년 87 세였다. 순조8년에 본원에 추향되었다. -
부용당선생
선생의 휘는 안의이고 자는 정포이며 호는 부용당인ㄷ데 참봉 휘 적의 아드님이고 시 중선생의 13대손이시다. 한강정술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을 탐구하였다. 선 조 신묘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을 만나자 창의하여 창녕현 의병장과 초토사 김성일의 소모관을 정유재란시에 곽재우 장군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지켰으며 무술년 에는 영남조도사가 되었다. 그 후 녕해 목사 남원부사 제주목사를 거쳐 우승지에 임명 되었으나 불취하였다. 인조 기사년(1629)에 별세하시니 향년 69세였다. 선무공신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순조14갑술(1814)에 본원에 추향되었다.
성간(成侃)
1427(세종 9)∼1456(세조 2). 조선 초기 문신이자 학자로 자는 화중(和仲), 호는 진일재(眞逸齋)이다. 지중추부사 염조(念祖)의 아들이며 유방선의 문인이다.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53년(단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한 후, 전농직장(典農直長)과 수찬(修撰)을 거쳐 집현전에 있었으나 단종복위 거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456년 6월 자신의 8촌인 성삼문이 주도한 사육신 사건으로 집현전이 혁파되자 사간원 좌정언(左正言)으로 이배된 후 오히려 간관(諫官)의 입장에서 하주반신전(賀誅叛臣箋)을 올려 그들을 역신으로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문명(文名)이 뛰어나 전문(箋文)을 짓는 소임을 맡게 된 후 바로 울화병을 얻어 그해 7월에 죽었다.
그는 경사(經史)는 물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도 두루 섭렵하여 문장·기예·음률·복서 등에 밝았다. 특히 시부(詩賦)에 뛰어나 〈궁사 宮詞〉·〈신설부 新雪賦〉 등을 남겼으며, 패관문학에 속하는 〈용부전〉은 문학적 가치가 높은 작품이다. 저서로는 <진일재집>이 있다.
성건(成健)
1439(세종 21)∼1496(연산군 2).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강(子强)이고 형조참판 순조(順祖)의 아들이며, 영의정 준(俊)의 동생이다. 1462년(세조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468년 춘장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당시 건주야인을 토벌하는 진서대장군 구치관의 종사관이 되어 변경을 돌보았다.
이듬해 성균관 전적이 되어 형들과 함께 전라도 영암·광주지방에서 일어난 도적의 무리를 소탕하는 대책을 제시하였다. 1476년(성종 7) 사헌부지평으로 당시의 권신 한명회의 권력남용을 탄핵해 결국 체직시켰다. 그 뒤 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을 지내고, 1479년 사헌부장령으로 언관(言官)의 우대와 언론의 보장을 주장하여 성종의 동의를 받았다.
이어 사도시첨정(司導寺僉正)으로 궁중의 살림을 주관하였고, 1482년 사헌부집의를 거쳐 홍문관전한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함께 경연에 참여해 내수사 장리(長利)의 폐단을 지적하고 수령의 인사관리를 엄히 할 것을 주장했다. 그 뒤 동부승지·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역임하고 1486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경기관찰사가 되어 연해도서지방에 둔전을 설치하고, 곧 내직으로 옮겨 예조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이듬해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89년 공조판서에 올랐다. 이어 도순찰사가 되어 해안방어를 점검하고 조창 이전 문제를 검토해 부분적으로 실시했다. 그 뒤 형조판서·우참찬·예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했다. 성품이 충직해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특히 성종의 신임이 두터웠는데 사람들은 일찍이 종친 계성군(桂城君)이 그의 집에서 자라 국왕과 왕대비가 비호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성경온(成景溫)
1463(세조 9)∼1506(연산군 12).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사아(士雅)이고, 부친은 영의정 준(俊)이며, 어머니는 참의 이계기(李啓基)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여러 해 과거에 급제하지 못했다. 1498년(연산군 4)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제수되었고 이어 사헌부감찰·호조좌랑·우사어(右司禦)·의금부도사 등을 역임했다.
150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공조정랑에 이르렀으나, 이에 앞서 부친이 중전 윤씨의 폐위에 찬성하는 상소로 연산군의 뜻에 거슬려 갑자사화 때 직산에 유배되었다가 교살되자, 형 중온(仲溫)과 함께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가 섬으로 이배되었다. 연산군이 부친을 용서해주지 않고 그에게 대죄를 씌우려 하자 “아들 된 자가 어찌 남의 손에 의하여 사약을 받으리오.” 하고 자살했다. 홍문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성계선(成啓善)
1566(명종 21)∼1608(선조 41).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측생(則生)이고 예조참판 수익(壽益)의 아들이다. 1594년(선조 27) 형 진선(晋善)과 함께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형제등제로 이름을 떨쳤다. 괴원분관(槐院分館: 문과에 급제한 사람 가운데 실무를 익히기 위해 승문원에 나누어 소속시킴)에 있다가 내·외직을 역임하고 1601년 병조좌랑(佐郎)에 승임되었으며, 이어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역임했다.
그 뒤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낸 뒤 1604년 서천(舒川)군수가 되어, 청렴하고 엄정한 정치를 행하는 목민관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임 중 아들의 과거급제를 위해 글씨에 능한 사람을 과거장에 들여보내 대리시험을 기도했다가 탄로나 파직되었다. 1606년 순천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정사를 향리에게 위임하여 민원이 발생하자 1607년 7월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고 이듬해 43세에 죽었다.
성구수(8世.독곡공)
독곡공의 손자이며 관직은 호조참판,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청백리(淸白吏)이시며 창산군(昌山君)에 습봉 되셨다.
묘는 문경공(석린)묘 좌측에 있다.
성규헌(成揆憲)
1647(인조 25)∼1741(영조 17).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송시열의 문인이다. 자는 중일(仲一), 호는 명탄(明灘)·원당(圓塘)이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 때 유학(幼學)으로 정도균·홍경렴 등 여러 선비들을 이끌고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시골로 쫓겨났다. 1694년 갑술옥사로 앞서 폐위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다. 1696년 이현명의 상소문을 대신 써주었다 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나 평시서봉사·한성부참군 등을 지냈다.
1705년 남구만·유상운을 구하려던 상소로 인하여 이명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자 수춘산에 들어갔다. 1726년(영조 2)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에 임명되자 시국의 당면과제 7조를 건의했고, 1736년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여러 기예에 능통했고 글씨도 잘 썼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춘천의 곡운(谷雲)서원에 봉향되었다.
성근묵(成近默)
1784(정조 8)∼1852(철종 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성사(聖思)이고, 호는 과재(果齋)이다. 성혼(成渾)의 후손이며, 부여현감·금구현령을 지낸 정주(鼎柱)의 아들이다.
1809년(순조 9)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1838년(헌종 4)에 양근군수 재임 시 이조로부터 학문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추천받아 경연관(經筵官)을 거쳐 1805년(순조 5)에 장령으로 발탁되었고 1807년에 집의로 승진했다. 1852년(철종 3)에 형조참의로 임명되었는데, 그 해에 죽었다. 청렴·강직하기로 이름을 떨쳤으며 학문이 빼어났다. 죽은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과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성기운(成岐運)
1847(헌종 13)∼?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충남 공주 출신의 친일정치인. 노론파의 자손으로 의익(義益)의 아들이다. 1879년(고종 16) 문과에 급제했다.
1884년 3월 주청상무서기관(駐淸商務書記官)이 되어 청나라 천진에 주재하면서 약 1년간 청나라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한 뒤 귀국했다. 1885년 4월 홍문관수찬, 1889년 형조참의·좌부승지·한성부소윤 등을 역임했고, 1890년 9월 인천부사 겸 감리(仁川府使兼監理)가 되어 각국과의 교섭 및 통상업무 등을 담당했다.
1900년 11월 주차일본전권공사(駐箚日本全權公使)로 약 6개월간 주재하면서 일본을 연구했다. 1902년 12월 철도원 총재로 경부선철도공사에 관여했고, 1904년 이후 경상남도·충청북도·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906년 11월 박제순 친일내각의 농상공부대신, 1907년 6월 중추원부의장, 1908년 장례원경(掌禮院卿)을 역임했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강제로 병탄당한 뒤 일본정부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성기인(成起寅)
1674(현종 15)∼1737(영조 1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천상(天祥), 호는 낙애(洛厓), 권하당(權荷塘)의 문인이다. 부친은 증예조참판 세황(世璜)이며, 모친은 밀양 박씨로 증이조참판 경휘(景輝)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에 과거에 급제,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제수 받았다. 그 뒤 저작(著作)·박사(博士)를 거쳐 호남어사·자인현감을 역임했다.
자인현감에 재임 시에는 제방을 쌓거나 저수지를 만드는 등 관개시설을 완비하고, 학교를 보수하여 지방교육을 진작시키는 등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1725년(영조 1)에 관서어사, 1729년에 만경현령으로 있을 때에도 인정으로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는 당시의 고질적인 당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당쟁타파의 방안으로 탕평책을 실시할 것을 주장했으며,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 <낙애일고>가 있다.
성담년(成聃年)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이수, 호는 정재(靜齋). 승문원교리 희(熺)의 아들이며, 생육신 담수(聃壽)의 동생이다. 1470년(성종 1)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 1477년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예문관수찬·정언을 역임하고 1479년에 공조정랑과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때 시사에 대한 소를 올리자, 왕이 친히 불러 그 진의를 묻고 내약방의 약재를 하사해 포상했다. 그 뒤 교리에 이르렀으나 곧 사직하고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저서는 《정재집》이 있다.
성담노(9世.회곡)
인재공의 여섯째 아들로 문신으로(정2품) 한성판윤을 지냈다.
성담령(9世.회곡)
인재공의 넷째아들로 호는 어조이시고 부친이 병자사화 연루로 불사하고 육괴정을 짓고 5인과 함께 도의교의를 나누며 도를 닦으며 시를 읊으니 세상에서 괴정육현(傀亭六賢)이라 칭한다.
(성담명 9世 회곡)
인재공의 넷째아들로 호는 어조이시고 부친이 병자사화 연루로 불사하고 육괴정을 짓고 5인과 함께 도의교의를 나누며 도를 닦으며 시를 읊으니 세상에서 괴정육현(傀亭六賢)이라 칭한다.
성담수(9世 회곡공)
이조 六代 단종복위사건(병자사화)에 찬동하여 충절을 지킨 생육신(生六臣)의 한사람이시다. 자는 이수이고 호는 문두(文斗)이시며 시호는 정숙(靖肅)이시다. 병자사화가 나자 公은 부친(성희:10여차례 국문시 함구무언하심)의 묘(파주 파평산)하에 칩거하며 허름한 초목에 흙바닥에서 기거하면서도 벼슬을 제수 하여도 끝내 숙배하지 않고 세상과 단절한채 몽구정(임진강변3대정자)에서 시와 낚시로 한을 삭히셨다 (졸년미상)
숙종때에 함안 유생들이 생육신서원을 창건하고 사액 되었는데 이 상소문에 전후6人의 행적은 각기 다르지만 마음과 행동은 일치하니 세상 사람들이 생육신이라 칭하는데 이는 사육신과 대칭해서 부르는 말입니다“ 하였다. 이외 창녕의 물계서원과 해남의 금성사에 배향되셨다. 정조6년 4월19일(1782)에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정조8년에 정숙이라 시호를 내렸다.
생년은 탁영(김일손)선생의 연대를 감안추정하여 1437년생으로 (1450 세종32년. 진사시에 합격) 추정된다.
성담중(9世.회곡)
인재공의 다섯째아들로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부친의 사화연루로 파평산선조 묘하에 은거 불사 덕과 학문을 쌓았다. 이름이 일사록(逸士錄)과 명현록(名賢錄)에 올라있다.
성대영(成大永)
1829(순조 29)∼?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현감 원호(元鎬)의 아들이다. 1858년(철종 9)에 진사가 되고, 1877년(고종 14)에는 무장(茂長)현감 재임 시 전라우도 암행어사 어윤중으로부터 근무성적이 좋다는 평을 받았다. 1885년 증광문과의 갑과로 급제해 동부승지·사간원대사간을 지냈다. 그 뒤 1887년 이조참의와 성균관대사성, 1892년 대거승지(對擧承旨), 1895년 관세사장(管稅司長), 1897년 중추원의관, 1902년에는 궁내부특진관과 독옥보관(讀玉寶官) 및 장례원경(掌禮院卿)·부묘도감제조(副廟都監提調)를 지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성대중(成大中)
1732(영조 8)∼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로 자는 사집(士執), 호는 청성(靑城). 부친은 찰방 효기(孝基)이다. 1753년(영조 29)에 생원이 되고 1756년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그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순조로운 벼슬길에 오르지 못할 처지였으나, 영조의 탕평책에 편승한 서얼들의 신분상승운동인 서얼통청운동(庶蘖通淸運動)에 힘입어 1765년 청직(淸職)에 임명되어 서얼통청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1763년에 통신사 조엄을 수행해 일본에 다녀왔고, 1784년(정조 8)에 흥해(興海)군수가 되어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었다. 정조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신분적인 한계에 묶여 부사(府使)의 벼슬에 그쳤다. 학맥은 노론 성리학파 중 낙론계(洛論系)에 속하여 성리학자로서의 체질을 탈피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대의 시대사상으로 부각된 북학사상에 경도하여 홍대용·박지원·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과 교유하면서 이들에게 가학 및 스승 김준에게서 전수받은 상수학적인 학풍을 발전적으로 계승·전달해 북학사상 형성에 일익을 담당했다. 낙론계 성리학자와 북학파의 중간적 위치에 처해, 정조대에 추진된 문체반정의 정책에 적극 호응해 북학파와 다른 성향을 보이는 점도 바로 이 중간적 위치와 신분적 약점 때문으로 파악된다. 저서로는 《청성집》 10권 5책이 있다.
성대훈(成大勳)
1572(선조 5)∼1636(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중집(仲集).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이 되었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뒤 후금이 침입할 기세를 보이자 관서원수 장만의 천거로 평양별장(平壤別將)이 되었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정충신의 휘하에 들어가 길마재 싸움에서 공을 세워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졌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도 전공을 세워 포상을 받았으나 이듬해 재물을 탐냈다는 죄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34년 별장이 되었으나 강화도의 위리안치소에 잡물을 들여놓았다는 죄로 다시 충주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병조판서로 추증, 다시 찬성사(贊成事)로 가증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성덕구(成德求)
1721(경종 1)∼1766(영조 42). 조선 후기의 문신·효자로 자는 극세(克世)이고, 좌승지 범석(範錫)의 아들이다. 1741년(영조 17)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고 1754년 익릉참봉(翼陵參奉)에 제수되었으며, 사헌부감찰을 거쳐 덕산현감이 되었다가 1762년에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46세에 죽었다.
효성이 지극해 부친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어머니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그 똥을 맛보아 병의 차도를 살폈다. 상을 당하자 통곡한 나머지 실신해 산소에서 들것으로 집으로 옮겼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지방관과 유생들이 그의 효행을 예조에 상신하여 1786년(정조 10)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복호(復戶:요역을 면제)의 은전을 베풀었다.
성덕우(成德雨)
1732(영조 8)∼1827(순조 27).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시윤(時潤) 호는 소옹(疎翁)이고, 좌참찬 혼(渾)의 6대손이며, 부친은 윤석(胤錫)이다. 1759년(영조 35) 진사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등용되어 현감으로 재직 중 1783년(정조 7)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듬해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1785년 부교리가 되어 무더운 여름날 경연을 중지하는데 대해 그 불가함을 상소했다. 1789년에 부응교가 되고 이어서 사간·교리를 거쳐 이조참의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