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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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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파설명

종파설명

성씨(우리成氏)는 시조 중윤공(中尹公)의 외아드님이신 문하시중공(門下侍中公) 휘 송국(諱 松國) 께서 판서공(判書公) 공필(公弼)과 찬성공(贊成公) 한필(漢弼) 형제분을 두셨다. 이형제분 중에서 판서공파(判書公派)와 찬성공파(贊成公派)로 크게 나누어졌는데 판서공파(判書公派)에서는 육세(六 世)에서 십파(十派)가 형성되었고 찬성공파(贊成公派)에서도 육세(六世)에서 삼파(三派)가 형성되어 도합 십삼파(十三派)가 되었다.

판서공파 (判書公 諱, 紀)

판윤(判尹)을 지내신 한충(漢忠)의 아들로 판서공파의 효시를 이루어 성씨의 대통을 이어나가게 됐고, 예조참의를 지내신 덕룡(德龍)과 무관이었던 그의 아드님 훈(勳)과 적(績)은 당시 추앙받았 던 인물이었다. 후손이 많이 살고 있느곳은 경상북도 영천군 화북면 신영(일명 大川)인데 그곳에는 지금도 대천서원(大川書院)이 있고 서원안에 시중공을 주벽으로 기(紀) 와 덕룡(덕룡)의 위패를 모신 창효사(彰孝祠)가 있고 덕룡(德龍)의 재실 망학당(望學堂)이 있다.

독곡(문경)공파 (獨谷公 諱, 石璘)

이헌공(怡軒公) 여완의(汝完)의 자(子)로 사형제중 장자이다. 독곡공(獨谷公)은 고려말과 조선조 초기의 명신(名臣)이다. 고려말에 보문각 대제학 정당문학(政堂文學)등을 지내시다가 1389년 이성 계를 도와 우왕, 창왕을 몰아내고 공양왕을 세움으로써 아홉공신의 한사람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 한 후에는 한때 공양왕의 척신(戚臣)으로 몰리어 경외(京外)로 추방되는 일도 있었으나 이성계와 태종간의 부자간 불화를 화합으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태종(太宗)때 영의정까지 이르 렀고 특히 시문(詩文)과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후손에서는 군수공 계증(君守公 繼曾)과 진사공 계조(進士公 繼祖)와 예천공 계종(醴泉公 繼宗)이 각각 분파를 이루었는데 효자 휘 석태(錫泰)와 그의 아들 필원(弼源) 양세(兩世)의 효행은 만인의 귀감이 되었다. 후손들의 세거지는 진안, 정주, 영산, 용암 등인데 현재는 대구, 서울 등지에서 많이 살고 있다.

회곡(문숙)공파 (檜谷公 諱, 石瑢)

이헌공(怡軒公) 여완의(汝完)의 둘째 아들로써 고려말엽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제학(提學)을 지내셨고 조선조에 들어와 강원, 경기 관찰사와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역임 하시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필법 또한 특출하였다. 후손중에는 증손이 되는 매죽헌(梅竹軒) 삼문 (三問)은 역사에 빛나는 만고충신 사육신(死六臣)중의 한분이셨으며 문두공(文斗公) 담수(聃壽) 역시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분이시었다.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은 주로 포천, 음성, 거창, 무주, 연기, 달전, 청도, 둔곡, 가평, 서울 등지이다.

상곡(정평)공파 (桑谷公 諱, 석연)

이헌공(怡軒公) 여완의(汝完)의 세째아들로 고려말 우왕 3년 공의 21세때 문과에 장원급제 하셨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때 강원, 충청 관찰사를 거쳐 대사헌과 예문관 대제학을, 그리고 형조(刑曹), 호조(戶曹), 예조(禮曹)의 삼부판서를 역임하셨다. 후손에서는 우상(右相) 봉조(奉祖)와 영상(領 相) 준(俊), 좌상(左相) 세창(世昌)등 상신(相臣)이 셋이나 나왔으며 대제학(大提學) 현(俔)과 대제학(大提學) 세창(世昌)으로 문형이 둘이 있었고, 또 동방의 거유(巨儒)요 문묘에 배향(配享)된 혼(渾)이 있다. 후손들의 세거지로써는 파주, 진천, 괴산, 의성, 무안, 금능, 서산, 충주, 양주, 아산, 예산, 서울 등지이다.

중낭장공파(中郎將公 諱, 석번)

이헌공(怡軒公) 여완의(汝完)의 네째아들로 고려말에 무과(武科)에 올라 중낭장(中朗將)이 되었으 나 병으로 크게 쓰이지는 못했다. 고려가 망한후에 형님세분은 모두 한양에 올라가 벼슬을 하고 홀로 송경(松京)에 남아 있었더니 아버님이 되는 이헌공께서 그가 병이들어 부모옆에 남아있는 것을 불쌍히 여겨 유지(遺址) 및 가장문기(家藏文記) 모두를 공에게 물려주어 그곳에 살게하였으니 홍무(洪武) 26년(서기 1398년) 계유년 4월 이었다. 얼마뒤에 돌아가시니 묘가 현 서울 강남구 우면 동 상곡동 묘소 국내에 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적하여 미확인중이다.
후손은 형님들의 삼곡(三谷)과 비견하여 크게 융성치는 못하였지만 아들인 선주부사 휘(諱)에서 상장군(上將軍) 서(敍)와 손이되는 회령부사(會寧府使) 이건(以乾)이 나와 낭장공파의 빛을 보았 다. 후손들의 세거지(世居地)는 하동과 진주 그리고 거창 등지이다.

판사공파(判事公 諱, 連)

동고공(東皐公) 준득(俊得)의 장자로 관직은 판사인데 후손에서 성문(成門)에 유일한 장신(將臣)인 무정공(武靖公) 윤문(允文)이 있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때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후손의 세거지는 현풍, 김천, 부산, 순천 등지이다.

시랑공파(侍郞公 諱, 遵)

동고공(東皐公) 준득(俊得)의 차자(次子)로 관직은 중서시랑(中書侍郞)과 참정(參政)을 지내셨다.

정절공파(貞節公 諱, 思齊)

정승 유득(有得)의 아들로 고려말 공민왕조시 보문각직제학 이라는 현직에 계셨지만 나라가 망하는 때를 당하여 절의를 지키신 충신이며, 두문동 72현의 한분이시다. 후손에서는 진주판관 수경(守慶) 과 의병장 천희(天禧)등 임진왜란시 국난을 극복하는데 혁혁한 무공을 세운분들이 많은데 조선조 초기에는 정절선생(貞節先生)의 유지를 받드는 마음에서 훌륭하신분들도 조선조의 정계나 학계에 나타내기를 꺼려했고 고향인 창녕고을에서 선영을 돌보며 청빈낙도의 생활을 했다. 후손들의 세거 지(世居地)로는 역시 창녕이 제일 많으며 대구, 부산, 서울 등지에서도 많이 살고 있다.

사인공파(舍人公 諱, 台俊)

지신사(知申事) 밀직삼(密直事)와 부사(副使)를 지내신 윤득(允得)의 長子인데 자세한 기록을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좌랑공파(佐郎公 諱 士俊)

지신사(知申事) 밀직삼(密直事)와 부사(副使)를 지내신 윤득(允得)의 次子이다. 후손은 옥구에서 많이 살고 있는데 역시 자세한 기록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평리공파(評理公 諱, 甲臣)

찬성공파(贊成公派)의 장손이며 관직은 평리(評理)이다. 검교문화시랑과 우문관 태학사를 지낸 시랑공(侍郞公) 이(履)의 장자이다. 후손이 많이 살고있는 곳은 경북 영천과 대구, 창녕 등지이다.

검교공파(檢校公 諱, 乙臣)

관직은 검교문화시중이다. 시랑공 이(履)의 둘째 아들이며, 평리공 갑신의 동생이다. 공의 셋째아들 사홍(士弘)은 집현전 태학사와 도참의 찬성사를 지내신 이름높은 분이었으며, 그의 뛰어난 시문(詩文)은 여지승람과 동문선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9세손이 되는 부용당공(芙蓉堂公) 안의(安義)와 부사공(浮査公) 여신(汝信)과 계서공(溪西公) 이성(以性)은 조선조 중기 이후 이름높은 학자요 문신이었다. 후손들이 많이 살고있는 세거지 로서는 창녕군 유어면, 진주, 부산 등지이다.

지사공파(知事公 諱, 彦臣)

전서공(典書公) 저(貯)의 아들로 관직은 지림주사(知林州事)를 지내신 봉상대부(奉常大夫)이시다. 그의 아들 문효공(文孝公) 사달(士達)은 고려말의 명신(名臣)으로 도덕과 문장필법이 뛰어났으며 손(孫)이되는 총랑공(摠郞公) 부(부) 또한 려말(麗末)의 절신(節臣)으로 두문동명현(杜門洞名賢)의 한분이시며, 5세손인 충정공(忠定公) 희안(希顔)은 중종반정을 성공리에 이끌고간 대표적인 정국일 등공신(靖國一等功臣)으로 영의정을 지내셨고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창성군(昌城君) 희옹(希雍) 역시 정국4등공신으로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였던 분이다. 그리고 6세손이되는 문장공 (文莊公) 세장(世章)은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낸 석학으로 호, 례, 공, 형, 조의 판서를 역임했고, 청백리(淸白吏)에 오르셨다. 후손들이 많이 살고있는 루대세거지(累代世居地)로는 경북 상주, 경기 도 양주, 충청도 예산, 전라도 영광 고창, 충북영동 등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