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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충현서원(성제원1506~1559) 등록일 23-02-10 14:15 작성자 최고관리자 (118.♡.14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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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서원(忠賢書院)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
충현서원 제향일은 년2회(음력3월,9월 초정일) 양력 2017. 10. 27
성제원(成悌元)1506~1559


公의 호는 동주(東州)이고 회곡공파 11세 이시다 어려서부터 뛰어난바가 있어 불과 14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그해에 기묘사화가 벌어져 많은 현인이 화를 당함을 보시고 책을 덮으며 “당고의 화가 현세에도 일어났구나” 하시고 탄식하며 은둔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후에 성현의 학문에 심취하엿으며 김광필의 성리학을 유우로부터 수학하여 마침내 심오한 뜻을 깨달았으며 당세의 유명한분들과 교분하며 견문을 넓혀갔다. 公은 효행이 남달랐으니 달전 언덕 뒤 옥정봉위에 축대를 쌓고 항상 모친의 묘를 바라보면서 울었다. 사람들이 그 축대를 “망묘대”라고 칭했다. 공은 48세에 유일(학력이 높은분들을 천거하여 관직을 제수)로 보은현감으로 재직하시다 사직하니 고을 사람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고 공의 선정을 기록하여 한권의 책을 내엇다. 公의 인품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에 성제원은 의지가 높고 친구를 대함에 한결같이 성신으로 하였으며 농담을 잘하고 온화 하였으며 효가 극진했으며 자연을 사량했으며 의리를 따르고 벼슬살이를 욕심없이 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하였다. 公은 16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도학군자 명현이셨으니 경학과 성리학에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도가적인 삶의 정취를 즐기고 불도의 정신세계를 인정하면서 그 기반은 유가적인 정조를 가지고 있었다. 公은 고결하여 젊어서부터 공리(功利)와 과거에 마음을 두지않고 유유자적하고 풍월을 읊으며 회포를 풀었으니 큰 세상에서 큰 뜻을 펼치고 싶었지만 세상이 혼탁하여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은둔고담의 세계를 살았다. 公이 보여주었던 그 순수한 정신과 고아한 정취. 그리고 명리에 대한 초연, 불변의 기개는 선비정신이 지니는 지조의 바탕이었으며 16세기 후반기이후 한국 도학정신의 밑거름이었다. 公이 남긴 저술이나 기록은 산실되어 겨우 시문집 “동주선생보고” 3권 1책(목활자본)이 전해진다. 公은 창녕의 물계서원, 공주의 충현서원, 보은의 상현서원과 금화서원에 배향 되었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0호이다. 1581년(선조 14)에 창건되었으며, 주자·이존오·성제원·이목의 위패를 모셨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0년(광해군 2)에 복원되었다. 1624년(인조 2) 조헌을 추가 배향했다. 1625년에 사액서원이 되었고, 그뒤 김장생·송준길·송시열을 추가 배향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없어졌다가 1976년에 복원되었다.
충현서원소장 주자영정(忠賢書院 所藏 朱子影幀)


시대 : 조선후기
저작자 : 7점은 작자미상, 2점은 전(傳) 안병문(安炳文, 安秉文)
문화재 지정 :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218호
창작/발표시기 : 18∼20세기
성격 : 초상화(肖像畵)
유형 : 작품
크기
112.5×56.5㎝(晦菴先生朱文公遺像), 112.7×58.9㎝(晦菴先生朱文公遺像), 97.0×46.2㎝(晦菴先生遺像), 91.5×50.5㎝(朱子立像), 84.5×47.2㎝(文公晦菴朱夫子眞像), 105.9×54.1㎝(朱子立像), 78.5×49.5㎝(朱子立像), 78.4×46.9㎝(朱子立像), 106.8×55.0㎝(朱子立像)
권수/책수 : 9점
재질 : 비단에 수묵채색(7점), 면에 수묵채색(2점)
분야 : 예술·체육/회화
소장/전승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공암리 381
 

공주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소장되어 있는 주자영정(朱子影幀)은 총 9점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여러 화가에 의해 제작되었다. 『충현서원지』에 실려 있는 서원의 중수기(重修記)와 사적비명(事蹟碑銘), 그리고 영정의 개모실록(改摹實錄) 등을 통해 영정의 제작 내력이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최초의 주자 영정은 1581년(선조 14) 고청(孤靑) 서기(徐起, 1523-1591)가 직접 중국의 남경(南京)에서 가져와 봉안했으나 임진 왜란을 겪으면서 유실되었다고 한다. 충현서원은 임란 후 1610년(광해군2)에 중건하였고 1624년(인조 2)에 조성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한동안 영정이 없이 사판(祠版)을 받들던 충현서원에서는 1712년(숙종 38) 서원의 유학 임우기(林遇箕) 등이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 묵수당(黙守堂) 최유해(崔有海, 1587-1641)가 중국에서 구해온 주자 영정이 경기도 연천의 임장서원(臨漳書院)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그 영정을 모사해다가 사당에 봉안하였다. 1790년(정조 14) 대대적으로 서원을 중수하는 과정에서도 기존의 낡은 영정이 다시 그려졌는데, 당시 충청감사 정존중(鄭存中, 1721-1798)은 비용과 함께 영문(營門)의 좌막(佐幕)으로 근무하고 있던 윤명택(尹命澤)을 보내 영정을 개모(改摹)하도록 하였다. 현존하는 주자영정의 수량으로 미루어 이후 19세기에도 몇차례 더 영정의 이모 작업이 이루어졌다.
1871년(고종 8) 흥선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에 의해 충현서원이 훼철됨에 따라 주자 영정은 공주향교 존경각에 이전 봉안하였다. 1917년에야 복설된 충현서원은 1925년 지역 유림들에 의해 원래의 자리에 재건되었다. 공주향교로 옮겨 보관했던 7점의 주자 영정이 2006년 충현서원으로 이안(移安)됨으로써 현재 9점이 유전하고 있다.


충현서원의 주자 영정은 우선 많은 수량이 한 곳에 전해 내려온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며 또한 역사적으로 충현서원의 성쇠(盛衰)와 무관하지 않은 유물이며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장기간 동안 제작된 주자영정의 실태를 한눈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그 결과 형식과 규모, 화풍이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데, 장황은 대부분 개장되었고 보존상태도 유물에 따라 편차가 있다. 이들 9점의 주자 영정은 도상의 특징 에 따라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유형은 ①번과 ②번 영정으로(유물 제목을 생략하고 유물목록의 번호로 지칭.) 그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작품이 ②번 <회암선생주문공유상(晦菴先生朱文公遺像)>으로 판단되며, 근래 개장된 족자 형식으로서 전반적으로 화면의 박락과 훼손이 심하다. 화면의 상부에 “회암선생주문공유상(晦菴先生朱文公遺像)”이라는 표제가 있고 여백에도 묵서가 있지만 일부 글자는 훼손되어 알아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