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녕} 창녕성씨 정절공파종회 두문동 선생 실기 출판기념회가 물계서원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등록일 23-02-27 19:39 작성자 창녕성씨대종회 (61.♡.68.146)
본문
창녕성씨 정절공파종회에서는 (파종장 성우경) 두문동 선생 실기 출판기념회가
2019년 5월 20일(월) 11시부터 창녕군 대지면 소재 물계서원에서 종원 및 내빈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출판회가 성대하게 열리기도 하였다. 회의 진행순서는 물계서원 성위경 이사장님의 사회 진행으로 국민의례, 선조배례, 상견례가 있었고, 문중발전에 기여하신 분들에게는 공로패 전달을 하였으며. 참석하신 내빈 및 임원소개를 이어서 성사경님의 책 발간에 대한 경과보고를 하고 성우경 정절공파종장님 인사와 더불어 한정호 창녕군수님과 이수영 창녕문화원장을 비롯한 성낙흔 대종회장님의 축사에 이어서 성지경 대구화수회장님의 두문동선생실기 책 발간에 대한 책 소개를 하기도 하였다. 또한 참석 하신 모든 분들에게는 두문동선생실기 책자를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하였다.
두문동 선생 실기책 내용 소개 글이다.
인물소개는?
貞節公 성사제(成思齊) 선생은 나의 시조이신 中尹 戶長 인보(仁輔)의 5세손으로 호가 두문자 貞節公派의 派祖이시며 공양왕 때 보문각 직제학(학술연구기관의 정4품관리)의 벼슬을 지내셨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차라리 王氏의 귀신이 될지언정 李家의 臣下는 되지 않겠다고 同志와 더불어 萬壽山 杜門洞에 들어가 불사이조(不仕二朝)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신 고려의 충신이시며 杜門洞 七十二賢의 한 분이시다.그 충절이 인정되어 1873(고종10) 정절공(貞節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正組 丁巳年(1797)에 물계서원에 추향(追享)되었다.
이책은‘杜門洞先生實記’1-3권과‘杜門洞先生實記續錄’1-2권 을 우리말로 쉽게 번역하여 합본한 것이다.
‘杜門洞先生實記’는 성사제 선생의 유사(遺事), 행록(行錄), 신도비명(神道碑銘) 등과 선생을 개성의 표절사(表節祠)에 추가로 배향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오갔던 여러 글들을 모아 엮은 책이고 ‘杜門洞先生實記續錄’은 선생이 ‘정절(貞節)’이란 시호(諡號)를 받기까지 오갔던 여러 글들을 모아 정리한 책이다.
‘杜門洞先生實記’는 성사제 선생의 후손인(8세손) 성석주가 조상에 대한 기록을 한 것으로써(1809년 간행) 내용을 소개하면 맨 앞에는 정종로(鄭宗魯:성리학자)가 지은 서문에서 선생은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 이씨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하고는 71명의 현자와 함께 벼슬할 때 쓰던 冠(관)을 나무에 걸어놓고(掛冠峴) 고개를 넘어(不朝峴) 만수산에 들어가 생을 마감한 충절의 정신은 만세(萬世)가 지난 뒤에도 길이 빛나고 있으며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는 감회를 나타내었다.
그 다음 1권에는 선생이 두문동에 들어가기 직전에 “寧爲王氏鬼 勿作李氏臣”라고 소외를 읊은 시가 실려 있다. 이어 영조가 경신년(영조16,1740)에 송도(개성)에 행차하여 不朝峴(부조현:고려 충신들이 조선의 임금을 배알하지않고 넘어간 고개)에서 신하들과 고려 충신을 두고 읊은 연구시(聯句詩:勝國忠臣勉繼世임금외 12분)가 실려 있다. 그 다음 영조의 어제어필御製御筆)인‘고려충신부조현(高麗忠臣不朝峴)’이라는 비(碑)와 이 비의 뒤에 쓴 개성 유수(開城留守) 김약로의 음기 그리고 비각의 상량문이 차례로 실려 있다. 말미에는 표절사에 ‘표절’로 사액(賜額)할 때의 액망(額望)이 실려 있다.
2권에는 선생의 8세손 진사(進士) 석주(碩周)가 지은 유사, 9세손 진사 구세(龜世)가 지은 행록,홍문관 교리 성덕우가 쓴 행장, 우부승지(右副承旨) 김굉이 찬술한 신도비명이 실려 있다. 이어 선생을 표절사에 추가로 배향하기 위해 개성부 진사 박성련 등이 개성 유수 조진관에게 올린 정문(呈文)이 있고 그 다음에는 경기.충청.경상.전라 4道(도)의 유생 대표인 유홍휴 등이 우의정 이병모에게 올린 정문과 이에 대한 제사가 실려 있다. 선생이 표절사에 배향되는데 이병모의 힘이 컷던 것으로 보인다.
3권에는 경기.충청.경상.강원 4도(道)의 유생 대표인 황재중 등의 상언(上言)과 이에 대한 예조의 회계,우의정 김재찬의 헌의,예조에서 계하(啓下)받은 관문(關文)이 실려 있다. 그다음 개성 유수 홍의모가 지은 표절사 고유축문,봉안축문,상향축문.창녕 현감 이전수의 물계서원 추향고유문,봉안축문,상향축문이 차례로 수록되어 있다. 이어서 선생을 물계서원에 추가 배향함(시중선생의 후손9분:현재는 21분)에 따라 행판중추부사 이복원이 지은 물계서원 원정비가 실려 있다. 그 뒤 마지막에는 앞서 신도비명을 지은 김굉의 발문(跋文)이 있다.
발문내용은 두문동 성선생의 후손이 ‘선생실기’ 책을 갖고 찾아와 한마디 말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기에 평소 높이 우러르고 흠모하던 분이라 선생의 충절을 후손들이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영조대왕께서는 ‘고려충신부조현’이란 일곱 글자를 비석에 새겨 게시하라는 명을 내리셨고,정조대왕께서는 표절사에 세 현자(조의생,임선미,맹씨)를 모실 것을 허락하셨고,당저(當宁:순조)께서는 4도(道)의 유생들이 추향(追享)하자는 청원을 윤허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성선생이 조이생,임선미와 맹씨 세 현자들과 함께 이름과 행적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 제사하는 예전(禮典)이 비로소 거행되었다.
다음 ‘杜門洞先生實記續錄’은 선생의 14세손으로써 고종때 사헌부 장령 성대진이 두문동실기를 증보한 판으로 선생의 증직과 시호를 청원한 내용과 시호가 내려지기까지의 과정이 수록되어 있다.
1권에는 경북 안동 진사 김래수 등이 선생의 증직과 시호를 내려달라고 청원한 상언이 실려 있고, 이조에서 영의정과 좌.우의정의 의견을 수합하여 임금에게 아뢴 글(吏曹啓)이 실려 있다. 당시 좌의정인 홍석주는 고려조의 충신에게 조선조의 관직을 추증하는 것은 맞지 않으니 시호만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홍석주의 의견이 받아져서‘貞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게 되었다.
2권에는 여주 이씨(驪州李氏)의 철감록에서 인용한 <부조현 언지록>이 실려 있는데, 이는 여러 충신들이 부조현에서 서로 헤어지면서 자신의 뜻을 말씀하신 내용이다. 그 다음에는 여러 후손들과 함께 이 일을 시종 추진했던 것으로 보이는 14세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대진(大璡)이 상(上)의 35년 갑오년(순조35,1834) 양월(陽月:10월 일(日)에 쓴 발문이 있고, 이어 마지막에는 구한말의 대학자인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께서 신사년(고종18,1881)에 쓴 발문이 실려있다.
*성대진의 발문 내용
선조이신 직제학 선생의 절의가 조정에 알려져 무진년에 특명으로 송경(개성)의 표절사에 추가로 배향되고(순조 8년:1808년) 그 뒤 갑오년(순조34,1834)에 다시 시호를 하사 받음. 혹자는 두문동 72현 중 13분은 분사 당하고 59명의 현자들은 고향산천으로 은둔. 선생은 부인 이씨(李氏)를 불러 아들의 이름을 두(杜)로 고쳐 두문동에 들어갈 뜻을 보이시고,부인에게 당부하기를“선친의 뒤를 이을 자는 오직 이 한 점 혈육이니, 당신은 이 아이를 데리고 창녕으로 내려가 모자가 서로 의지하며 우리 성씨의 후손을 끊지 말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 이진상의 발문내용
杜門洞 72현 중 정절공 성선생(成先生)이 홀로 杜門이란 칭호를 얻은 것은 어째서인가? 여주 이씨 철감록을 얻어보니 부조현(不朝峴)에서 제현들이 고려를 위해 충절을 지키겠다는 뜻을 말씀하신 내용이 실려 있는데 선생의 ‘차라리 왕씨의 귀신이 될지언정...(寧爲王氏鬼勿作李氏臣)’이라는 열 글자의 맹세한 글이 맨 앞에 놓여 있고, ‘두문동실기’가운데에 아들을 ‘두(杜)’라고 이름하여 고향 산으로 돌려보낸 것이 또 서로 부합하니,공이 충절을 지켜 깨끗이 하려는 의리를 맨먼저 선창해서 두문동의 주인이 되신 것이 분명하다.
▶사진촬영 및 편집인 : 대종회 홈페이지 운영위원장 성기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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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gh4609.tistory.com/2599 (홈페이지 운영위원장 성기효 블로그로 링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