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대구시] 창녕성씨 대구화수회에서는 조선중기 성리학자이신 우계 성혼 선조님 묘소와 기념관 탐방하였다. 등록일 23-02-27 20:05 작성자 창녕성씨대종회 (61.♡.68.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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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성씨 대구화수회에서는 종원 40명과 함께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조선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 선조님의 묘소와 기념관을 탐방하기도 한다. 장거리 파주까지 갈 길이 멀어서 대구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을 하여 약 4시간을 달려서 이곳 우계 성혼 선조님의 묘소와 기념관에 도착을 해보지만 역시 선조님의 얼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동안 몰랐던 선조님의 발자취를 더듬어보면서 역사공부를 많이 하기도 한다.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 선조님의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 또는 묵암(?庵),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파평 우계(牛溪) 옆에 살았으므로 학자들이 우계선생이라 불렀다.성혼은 명종 6년(1551) 생원·진사의 초시에 모두 합격하였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명종 9년에는 같은 고을의 율곡 이이 선생과 사귀게 되면서 평생 지기가 되었다. 퇴계 이황의 학설을 이어받아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여 이이와 선조 5년(1572)부터 6년간에 걸쳐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논쟁을 벌여 유학계의 큰 화제가 되었다. 선조초 때부터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다가 이이의 권유에 의해 이조참판에 특배되고 임진왜란 중에는 우참찬에 오르고 선조 27년 좌참찬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하다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고향인 파주로 돌아왔다. 그가 죽은 뒤 선조 35년 기축옥사(己丑獄死)와 관련하여 관직이 삭탈 되었다가 인조 11년(1633)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사진촬영 및 편집인 : 대종회 홈페이지 운영위원장 성기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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